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천보 전투 (문단 편집) === 신문 === [[파일:external/archivenew.vop.co.kr/03105320_63.jpg]] * 위 이미지는 [[1998년]]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[[평양]]을 방문했을 때 [[북한]] 측에 선물한 것으로, [[동아일보]]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(1937년 6월 5일)를 [[황금]]으로 뜬 금형이다. 원본은 [[평양]]의 [[김정일]]선물관[* [[김정일]]이 집권했을 당시 타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]에 있다. [[http://www.journalist.or.kr/news/article.html?no=16207|#]] [[탈북자]]인 [[주성하]]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[[김일성]]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전 조선에 널리 광고해 준 덕분에 북한에서 동아일보의 이미지는 매우 좋다고 한다. 그래서 보천보 전투 선전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라고 한다. >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 백여 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 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야 보천보 촌락의 천여 명의 주민은 공포에 떨게한 소위 제이동흥사건[* 이홍광이라는 다른 인물이 동흥읍, 북한에서 [[김형직군]]의 일환으로 관리되는 지역의 국경지대를 습격한 사건으로 일본측 사상자는 보천보 전투보다 많았다. [[https://db.history.go.kr/item/level.do?levelId=npjj_1935_02_16_x0002_0820|#]]]을 일으키었다. >---- >동아일보, [[1937년]] [[6월 8일]]자. *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문이 김일성에 대해 다루려면 비적으로 취급하는 수밖에 없었다. 그래서 김일성을 비적으로 규정한 당시의 신문 기사는 보천보 사건 한 해 전에도 존재했다. 예컨대 [[조선일보]]는 [[1936년]] [[10월 4일]]에 [[김일성]]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(十六道溝)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이라는 조선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실었다. 그 밖에도 당시 [[김일성]]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.[[http://www.dailynk.com/korean/read.php?cataId=nk07008&num=103840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